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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햇살을 / 그녀의 글을 탐하다

낭자 헌정곡

by 소소planet 2023. 8. 3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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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봄을 부르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낡은 청사의 지붕 위로 빗소리만이 시골의 정막을 깨고 있었다. 

청사의 문이 열리고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술에 취한 듯 휘청이는 걸음걸이, 한 번도 세탁하지 않아 때가 옷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점퍼, 추위에 얼어버린 손등 위로 기름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치려 애쓰는 그와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직원들 간의 작은 신경전이 느껴졌다.

힘겹게 마주친 그녀와의 시선!

그는 이때다 싶어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1미터의 민원대를 사이에 두고 술냄새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아가씨! 내가 말이여. 말소가 되었다는구만... 저기 수원 가는 길 고속도로 현장에 있잖소. 거기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등본이 있어야 돈을 준다고... 어떤 놈이 말소를 하는 거여."

사무실 안에 그의 쌍욕이 날아다녔다. 

그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의사전달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그는 고맙게 느끼는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이 여기저기 다니는 일이요. 어떤 때는 울산에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기 광주에 가기도 한단 말이요."

그의 목소리를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의 생활에 화가 난 듯.

그는 돈이 없음을,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뿐임을 강조했다. 그녀는 그가 애처로웠다. 말소된 등본을 보니 그는 미혼이었다.

50년생의 미혼! 

가난이 그를 혼자 있게 한 것이었을까?

건설현장에서 돈을 받으려면 그는 등본이 필요했다.

그녀는 그에게 재등록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은 돈이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과태료를 대신 냈다고 말했다.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다.

"무슨 소리여! 아가씨 무슨 돈이 있다고... 그라문 안되제. 내가 잘못한 것은 내가 해야잖소. 참.. 내가 이라는 것은 똑바로 알고  하라는 것이요. 젊은 아가씨! 미안해요. 그라믄 안 되제.... 내가... 그라믄.. 돈 받아 오면 꼭 주겄소. 참...."

그녀는 등본을 하얀 봉투에 담아 비에 젖지 않게 주머니에 넣으시라고 건넸다. 

그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그 후 며칠!

북적거리는 민원인 틈으로 누군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였다. 여전히 술냄새가 났고 그가 무슨 전염병인 것처럼 피하는 사람들 틈으로 시꺼멓게 기름때가 낀 손 위엔 한 잔의 커피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모든 민원인을 몰아내고 그녀 앞에 섰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3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젊은 아가씨! 벌금 여기 있소. 하이고 참. 고맙기도 하고... 벌금은 내가 내야제.. 아가씨가 무슨 돈이 있겄소?"

만류하는 그녀를 뒤로 두고 

그는 햇살을 받고 휘청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사무실에서  '그가 모르는 그녀의 친구'로 통했다. 

그의 육신은 힘겨운 삶의 무게에 망가졌지만 영혼만은 맑게 살아있는 것았다.

한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봄이 되고, 여름이 지날 무렵 가끔씩 그를 버스정류소에서 볼 수 있었다. 술기운에 젖은 채 햇살을 받으며 길 위에 쓰러져 자고 있곤 했다. 그의 체념에 그녀는 화가 났고, 또 연민이 일었다. 생명이 신비롭고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그에겐 '고통'으로 보였다. 

그 후 그를 민원실에서 한번 더 볼 수 있었다. 변함없이 술에 망가진 채, 그는 자동차 주소 미이전으로 엄청난 과태료를 내야 했다. 이미 차는 폐차가 되었음에도 폐차증명서가 없어서 쫓아온 것이다. 그렇게 그는 불행의 고리에 매달려 슬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밝게 할 힘이 미약하다.

그의 생명에 슬퍼해 줄 사람 없고, 사람에 대한 증오로 변하기 전에 누군가 그를 안아야 하는 게 아닐까?

 

* 이 이야기는 어느 공직자의 초임 발령 시절 소환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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